본당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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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소개

본당소개

본당 소개
- 명칭 : 천주교 마산교구 함안성당
- 설립 : 1932년 6월 5일
- 소재지 : (우)52041 경남 함안군 가야읍 방목2길 13
- 전화 : 사무실 055-583-2042, 사제관 055-583-1695, 수녀원 055-583-2518
- 주보 : 승리의 동정 성모 마리아
- 공소 : 구읍공소 055-585-9520
- 신자현황(수계) : 521세대 1,126명
- 어린이집 : 군북 성모어린이집 055-585-9959

- 사목주임 : 노영환 마티아 신부
- 한국외방선교수녀회 분원 : 최영진 정혜엘리사벳 수녀, 최분희 트리니티루가 수녀, 황은주 페트라 수녀(어린이집)
- 본당 총회장 : 문창호 베드로
- 연령회장 : 강신근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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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본당의 역사를 본당 설립이후 80년대까지를 중심으로 알아봅니다.
함안지역의 복음 전파 경위, 일제 강점기의 복음 선포와 탄압, 8.15해방에 따른 격동기의 본당 발전,
1980년대의 산업화에 따른 본당의 변화를 말씀드립니다.
80년대 이후로는 대부분 신자들이 직접 체험한 역사이기에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함안 지방의 복음의 씨앗은 대산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하였고, 상당수의 신자가 있었습니다.
가야의 전교는 주로 대산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1900년에 함안 말산공소 홍종대 요셉의 집에서 영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때 이미 가야에도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신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본동 홍종대 요셉 집에서
정수학 안또니오(정해창 바오로의 고조부,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집으로 공소를 옮기게 되었고,
정수학 안또니오가 공소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정수학은 공소회장에 이어 본당 승격시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안지방에 신자수가 증가하고 복음이 전파되어 나가자
당시 완월본당을 담당하고 있던 프랑스 신부 유리오 베르몬 목세영 신부님이 장차 함안 본당 승격에 대비하여
본당 예정지로 현재의 위치인 도항리 74번지 일대를 선정하였습니다.
당시의 신자수를 보면 대산 지방에 훨씬 많은 신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곳 가야에 본당을 설립하려고 한 것은 교통이 편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환경과 조건이 유리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먼 훗날을 내다 본 듯 합니다.
당시 이 일대는 밭이었는데,
정수학 안또니오의 기증과 부지 매입으로 1932년 6월5일 함안군 의령군 창녕군을 관활 구역으로 함안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1932년 6월5일 마산 완월본당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함안 본당은 복음 전파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초대 루까스 유가홍 신부님은 함안보다 신자수가 월등히 많았던 대산면 평림리 가등 공소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무를 집행하였습니다.
본당으로 승격된 지 1년만인 1933년에 6간 목조 기와집을 성당 건물로 신축하게 되었고,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가등에서 임시 거처하시던 유 신부님이 함안 본당에 자리를 잡고 사목하시기 시작하자,
신자수는 놀랍게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지역 복음화의 전초지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가홍 신부님은 복음선포의 일환으로 본당 내에 야학을 열고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지방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글을 깨우친 사람들의 상당수가 본당의 야학을 통해서였습니다.
유가홍 신부님은 성당 안에 일장기를 걸어놓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많은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욕과 구타를 당했던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고초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본당의 기틀은 확고하게 다져졌습니다.
유 신부님은 재임 10년 동안 560명 이상의 영세자를 내었는데, 당시의 사정으로는 참으로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1943년 김영제 요한 신부님이 부임하셨습니다.
일본은 대전 말기 최후의 발악으로 전쟁 물자를 충당하기 위하여 성당의 종마저도 징발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함안면에 있던 경찰서를 옮기기 위하여 지금의 성당 자리를 강제로 빼앗으려 하였으나,
김 요셉 신부님은 목숨을 걸고 본당을 지켰습니다.
1945년 일본군은 성당을 강제로 점령하고,
한 달가량 주둔하고 있었으나, 8.15해방과 더불어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복음 선포의 터전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8.15 해방으로 교회는 새로운 여명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김영제 요셉 신부님은 일찍이 유아 교육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삼일유치원을 개설하게 되었는데, 함안지방 최초의 유아교육 기관이었습니다.

6.25전쟁 때 김동언 베드로 신부님은 인민군이 함안을 점령할 때까지 본당을 지키고 있다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 때 주변의 많은 민가들은 거의 잿더미로 되었지만,
성당만은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을 떠났던 신부님과 신자들이 다시 돌아와 본당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으로 배움의 기회를 잃었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가야 여자 고등 공민학교’가 성당 내에서 문을 열게 됩니다.
이 학교는 현재 ‘함안 여자중학교’의 전신입니다.
1952년에서 1956년까지 2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당시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학교는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제4대 제찬규 시메온 신부님이 부임하자 본당의 모습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젊은 혈기로 넘치던 제 신부님은 온 정력과 젊음을 바쳐서 복음 전파와 본당 발전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전쟁후 외국의 구호물자가 쏟아지고, 영육으로 배고프던 민중들은 본당으로 몰려왔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비좁았고, 한집 걸러 한집이 신자일 정도로 전교는 잘되었습니다.
1950년에서 1961년 사이에 영세자 수가 1,500명이나 되었습니다.
성당 건물은 새로 증축하고, 강당 사제관 수녀원을 새로 신축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의령 대산 칠원등의 공소 부지를 매입하고, 공소를 신축하는 활발한 전교를 했습니다.
함안본당은 그야말로 가장 좋은 성당으로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침저녁으로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본당은 젊은이들의 집결지였고 신자들은 본당에서 영혼의 안식과 육신의 휴식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인화와 단결이 잘되어, 번창 일로에 있었습니다.

4.19 학생의거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사회는 급변하고, 본당도 보호될 수는 없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본당이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하고, 마산에는 자유수출단지가 조성되면서,
마산은 대도시로 비대하기 시작했고, 함안을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뚫리게 되었고,
산업화의 물결은 본당의 모습을 바꾸어놓고 말았습니다.
본당을 융성하게 하던 구호물자가 떨어지자, 신자도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젊은이들은 도시로 일감을 찾아 나섰고, 텔레비전의 보급은 신자들의 생활을 안방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냉담자의 속출과 함께 교적을 정리하지 않고 고향을 떠나는 행방불명 신자가 늘어갔습니다.
동시에 대산, 칠원과 같은 큰 공소가 본당으로 분리 승격되면서 본당의 재정자립마저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80년대 90년대에 젊은 신부님께서 계속 부임하면서, 본당의 부흥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신자들의 자각으로 새로운 본당의 모습을 가꾸었습니다.
1992년에 17대 곽준석 요셉 신부님이 부임하시고, 1996년 성모어린이집 전신인 군북어린이집을 설립하고,
1997년에 현재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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